제1장 역사속의 인물 제3절 조선시대 이계철(李啓喆) :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성오(省吾), 호는 일서(一西), 득성(得成)의 후손. 무과에 급제, 해주 조이포 만호(海州助泥浦萬戶)을 거쳐 수사(水使)를 지냄.
이인하(李寅賀) : 조선 고종때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정언(正言) 득성(得成)의 후손. 1876년(고종 13)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 부사과(五衛副司果)을 지냈다.
이인호(李寅顥) : 조선 고종때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호는 만성(晩醒), 수사(水使) 계철(啓喆)의 조카. 1862년(철종13) 무과에 급제하여 1865년(고종 2) 독용산성 별장(禿用山城別將)으로 선략장군(宣略將軍)의 벼슬에 올랐고, 1876년(고종 13) 중시(重試)에 합격,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겸 창덕궁 위장(昌德宮衛將)을 지냈다.
이종득(李宗得) : 조선 순조때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덕삼(德三). 일봉(日鳳)의 현손. 785년(정조 9) 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 부호군(副護軍)을 지냄.
이휘순(李徽純) : 조선 고종 때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1877년(고종 14)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사과(五衛司果)를 지냈다.
제2장 효 행 록
제3절 효 행
이상호(李尙虎) :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문숙(文淑), 호는 소재(素齋), 동익(東益)의 후손으로 원덕면 이천리(理川里)에서 살았으며 천성이 충효에 지극하여 15세 때 조부님의 변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렸으며 가난한 살림에도 어머님을 극진히 봉양하였으나 상을 당하였다. 조실부모의 지극한 슬픔으로 시묘살이 3년만에 다시 3년을 더 묘를 지켰으며 영조·정조 양조의 국상을 당하여 6년동안 소복을 입었으며 또 스승이 돌아가시자 3년간 마음속의 상을 입었다. 나이 99세에 숭정대부(崇政大夫) 동추(同樞)의 벼슬을 받았다. 순조(純祖) 17년(1817) 여름에 정여문을 세우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글을 지었다.
제6절 일 행
김 씨(金 氏) : 본관은 삼척(三陟) 우계이씨(羽溪李氏) 구연(九淵)의 처로 이천리(理川里)에서 살았으며 나이 20세에 남편이 죽으니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고 땅에 묻어야 했고 슬하에 자식도 없는 것이 지극한 한이 되어 남편을 뒤좇아 같이 죽으려고 여러날 밥도 먹지 않으니 시부모님이 보고 매우 슬퍼하고 회심이 컸다. 식사때는 남편 묘에 올라가 피눈물을 흘리니 제주와 눈물로 잔디가 말라 죽었다. 그러다 시아버님께서 병으로 눕자 대신 죽기를 원하며 빌었더니 꿈속에 노파 신이 나타나 침술을 가르쳐 주어 은으로 크고 작은 침을 만들어 치료하여병이 나았으며 시어머님이 늙어 이가 다 빠지니, 엿과 사탕을 항시 준비하여 드리고 병환중에 강물의 생선을 잡숫고 싶어하시니 얼음을 깨고 붕어를 잡아다 드려 병이 나았다. 자식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데려다 키워 후사를 잇게 하였으며 나이 59세에 돌아가셨는데, 고종(高宗) 6년(1869)에 열녀 표창이 내리고 이태규(李泰奎)가 글을 지었다.
이소사(李召史) : 본관은 우계(羽溪), 삼척김씨(三陟金氏) 정교(政敎)의 처로 평릉리(平陵里)에서 살았다. 남편이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으로 10여년이나 고생하고 임종에 다달으니 단지하여 수혈하였더니 3일간 회생하였으나 마침내는 한모금의 물도 입에 들어가지 않으니 구할 수 없었다. 성복후에 자식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만약 내가 죽거든 같은 구덩이에 같이 묻어 달라고 부탁하고 음독 자살하여 남편을 따랐다. 고종(高宗) 28년(1891) 가을에 유림에서 상신하니 승지(承旨) 한인호(韓麟鎬)가 임금에게 복명하여 열녀 표창이 내렸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 정준화(鄭俊和)가 글을 지었다.
제7절 규 행 이광여(李廣汝) : 1881 - 1963. 본관은 우계, 윤엽(潤燁)의 장녀, 미로면 무사리에서 출생, 17세때 삼척읍 교리 김해김씨 형태(衡泰)에게 출가. 성품이 인자하고 범절이 타인의 모범이었다. 30세에 남편과 사별하니 자녀의 양육과 제사 봉양이 막연하고 가정부채의 청산방안이 속수무책이었다. 가산을 방매, 부채를 청산하고 전세방을 구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조상제사를 봉양하며 자녀교육을 위해 근검방직과 피나는 노력으로 가세부흥에 전념한 나머지 10여년의 고생끝에 가세가 풍족하게 되어 이웃의 칭송이 군내에 퍼지게 되자 1922년 삼척군의 열녀포상을 받았으며 士林의 추천으로 성균관의 표창을 받았다.
제2절 과거급제자 2. 武科及第者
李宗得 羽 溪 1785년(정조 9) 別 試 副護軍
李寅顥 羽 溪 1862년(철종 13) 昌德宮衛將
李寅賀 羽 溪 1876년(고종 13) 五衛副司果
李徽純 羽 溪 1877년(고종 14) 五衛司果
제1장 읍 지
제1절 도계읍
씨족(氏族) : 연산군 때 삼척 심광수(沈光壽)는 강릉 회산리(淮山里)에서, 중종 때 김영 김진규(金振奎) 및 김수구(金壽九), 광해군때 경주 이시두(李始斗) 및 이권좌(李權左), 남양 홍대봉(洪垈鳳), 해주 오진한(吳震翰), 김해 김태삼(金泰三), 현종 때 안동 김익균(金益均), 울진 장운세(張雲世), 풍천(豊川) 임한진(任漢進), 우계 이문웅(李文雄), 김갑봉(金甲峯) 및 여산(礪山) 송행길(宋行吉) 등이 점차 이주해 ~
제2절 원덕읍(遠德邑)
4. 이천리(理川里) 본 리는 원래 마흔천리(麻欣川里)라 했던 것인데 1914년에 마천(麻川)과 수리(壽理)의 양마을 이름을 따서 이천리(理川里)가 되었다. 마천(뭇내)은 오천(梧川) 혹은 가천(駕川)이라 불리우는 속칭도 있고, 수리는 李氏들이 들어와 번창하므로 수리(樹李)라 하더니 후에 수리(壽理)가 되었다. 중종때 우계 이동익(羽溪 李東益)은 수리동에, 선조 때 남양 홍사호(南陽 洪士豪)는 근덕면 맹방리로부터 마천리에 각각 이주해 ~
5. 옥원리(沃原里) 조선시대 옥원역 소재지로 오원(五原)이라고도 하며 1894년 역(驛)과 객사(客舍)였던 옥원관(沃原館)이 폐지되고 옥원리라 하였다. 중종 때 우계 이도근(羽溪 李道根), 도천(道千) 형제가 이주해 ~
8. 노경리(魯耕里) 본 리는 처음 노거리(路巨里) 또는 노가리(路街里)라 하더니 와전이 되어 노경리가 되었다. 인조 때 김해 김봉의(金鳳儀), 삼척 김경(金慶) 그후 우계 이수업(羽溪 李壽業), 강릉김씨 등이 이주 해~
제2장 면 지
제1절 근덕면(近德面)
4. 교가리(交柯里) 본 리는 고구려의 파리현(波利縣), 신라 통일시대는 해리현(海利縣)의 소재지였다고 하며 지난 시절 교가역(交柯驛) 및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의 소재지고 지금은 근덕면 소재지다. 마을 가운데 느티나무가 있어 나무가지가 상교(相交)한다 하여 교가리(交柯里)라 하였다. 고려 때 김인궤(金仁軌)가 살던 곳이라 하며 560년전 김귀존(金貴存), 그 이후에 정언 이득성(正言 李得成), 이운소(李雲韶), 김영후(金榮厚)와 박, 배, 전, 최, 서, 장, 안, 김 등 각 성씨가 이주해~
10. 궁촌리(宮村里) 본 리는 고려 공양왕(恭讓王)이 왕위를 이성계에게 물려주고 원주(原州), 간성(杆城)을 거쳐 이곳에 궁궐을 옮겼다 하여 궁촌(宮村)이라 했다. 선조 때 강릉 최석담(崔石潭), 삼척 김태관(金台寬), 영천이씨, 우계이씨, 그후 심상원(沈尙願), 영일정씨 등이 이주해 ~
13. 용화리(龍化里) 본 리는 북방 해안에 용굴(龍窟)이 있어 용해(龍海)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용화(龍化)가 되었다. 인조 때 홍춘빈(洪春彬), 이귀돌(李貴乭)이 이주해 왔는데 이씨는 헤어져 없어지고 후에 삼척김, 경주최, 우계이, 평해황씨등이 이주해 ~
제6절 신기면(新基面)
3. 고무릉리(古武陵里) 1662년 허목이 쓴 척주지에는 고물암(古勿庵)이라 하였다. 이는 옛적 이곳에 고물암이란 암자가 있었으므로 동명(洞名)이 된 것이고 이것이 와전되어, 1916년 심의승의 삼척군지에 고무릉으로 기록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숙종 때 경상도에서 우계 이문웅(羽溪 李文雄)이, 영조 때 강릉에서 김사희(金士熙) 및 김도남(金道南)이 이주해~
우계인: 그렇군요. 시조께서 강릉일대에 터를 잡은 터라 유명한 많은 우계인들이 등재되어 있군요 .... -[04/23-09:59]- 이은영: 아 ... 그랬군요. 강릉하고 삼척이 가까운 곳인가보네여? 가까운곳이면 분가하기도 쉽지는 않을는지~~ -[05/23]-